House of the Rising Sun

국내에는 The Animals 가 부른 버젼이 더 익숙하겠지만

Joan Baez 가 부른 1960년 버젼을 선호한다.

바에즈가 1941년생이니까 19살에 뱅가드 레코드에서 발매한 Joan Baez Vol.1은

46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대부분의 곡이 그녀의 보컬과 기타로만 이루어져 있는이 앨범은

지금 기준,아니 당시기준으로도 매우 단순한 구성의 셀프 타이틀 데뷰 앨범이지만 골드를 기록했다.

(골드레코드여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이앨범이 망한 앨범이어도 나는 좋아했을테지만)

19살 처자가 부르는것이라고는 믿을수없는 원숙한 노래실력과 강한 비브라토,
중고등학생당시 얼마나 즐겨들었는지 모르겠다.

rake and rambling boy 의 엽기 발랄한 노랫말도 충격이었지만

house of the rising sun 의 절절한 느낌은 The Animals 의 늘어지는 듯하는 버젼을 마음속에서
별로라고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잘 알려진대로 house of the rising sun은 미국의 민요이고 rising sun blues 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노래가사는 뉴올리언즈의 한 잘못 풀린 인생의 격정어린 자기고백이다.
자 그럼 The House 는 어디냐?
(Joan Baez 는 house of the rising sun 이고 The animals 는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으로 처음에 the가  붙고 안붙는 차이가 있다.)

노랫말의 해석은 몇가지가 있는데 화자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갈린다.
널리 알려진 해석은 화자가 여성인 경우
노래의 the house는 매음굴의 은유이고 ( 매독치료받는라 강제격리된 여성이 부른 내용이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어머니를 두들겨패는 주정뱅이 망나니인 아버지를 살해한 딸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감옥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설도 존재한다. 가사중 a ball and chain 이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들이 작중화자라는 설도 있다. 노예농장은 많은 블루스 곡들의 소재가 되어왔으니까 이것도 일단 그럴듯하게 들린다.
작중화자가 남성인 경우는 the house 는 도박장이나 감옥으로 풀이되는 것같다.

조운 바에즈의 버젼은 여성화자가 부르는 내용이라 처음 말한 내용으로 들린다.
(애니멀스 버젼은 화자가 남자이고 도박과 술로 인생을 탕진한 남자가 아마도 빵에서 회한에 가득차 부르는 느낌이다.)


영어 위키 문서를 참고해 보면 여러가지 설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그 문서 말미의 프로이트 선생의 말처럼 "어떤때는 노랫말은 그저 노랫말" 일 뿐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razor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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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모건 프리먼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들어가면 적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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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zor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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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0

일상 2012. 1. 10. 16:51
어디선가 퍼온 미국의 70-80년대...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갔어. 그 영화를 극장에서 더 이상 틀지 않으면? 할수 없는거지. 스타워즈는 1977년에 나왔는데 그게 페이퍼뷰에 올라간게 5년 후인 1982년이었어. 내 주변에 그걸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그해에 비디오테잎으로도 나왔는데, 비디오 기계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처음 티비에서 틀어준게 1984년이었어. 극장에 발매되고 7년 후에 말야. 처음 스타워즈를 보고 5년동안 그 영화를 못봤다니까.


 비디오 기계? 테잎을 기계 뚜껑에서 넣어야됐고, 문손잡이 크기만한 버튼들이 있었고, 가격은 80년대 돈으로 700달러. 물가조정을 하면 요즘 돈으로 1858달러야.



내가 첨으로 MTV를 본게 1987년. 그때가 내가 살던 동네에 케이블이 들어왔을때야.



 바, 혹은 클럽에 갔다 오면 몸에서 재떨이 냄새가 났었지. 입고있던 옷을 다 빨거나 샤워를 하지 않고 그냥 자면 다음날 아침 목이 퉁퉁 부어있곤 했어.



금요일만 되면 은행에 줄을 서서 현금을 입금 혹은 출금하곤 했지. 주말동안 현금이 다 떨어지면? 월요일에 은행 문이 다시 열때까지 기다리는수밖에.



신용카드가 처음 나왔을때, 신용이 아주 좋은 남자들만 카드를 발급받을수 있었어. 독신인 여자들은 비록 성공적인 사업가라도 카드를 갖지 못했지. 결혼을 했다면 남편 이름으로 발급받아서 쓸수 있었지만. 80년대에 이 모든게 바뀔거라는 이야기가 적힌 신문기사를 읽었었는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숨이 붙어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발급해주더라.



휴대폰, 삐삐, 문자메세지, 음성메세지, 그리고 심지어 전화 응답기조차 없었어. 누구와 만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집에 있을때까지 전화를 해서 그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 그때서야 약속을 잡았지.



페이스북이나 이메일 따윈 없었고 시외통화는 굉장히 비쌌어. 대학에 갔을때 친구들과의 연락이 몇달동안 끊기곤 했었지. 편지를 쓰지 않는다면 말이야.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냥 사라져버리곤 했어.



유학을 간다면 연락이 제대로 끊겼어. 굉장히 얇은 항공우편용 편지 외엔 연락수단이 거의 없었으니. 2년 넘게 통화는 커녕 얼굴도 못보고 몇줄의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생각해봐.



모든 비행기편은 여행사를 통해서 잡아야됐어. 항공사에 직접 전화할수도 있지만, 그러면 공항에서 비행기표를 받아야 했었지.



공항에 그냥 가서 현금으로 비행기표를 사고 곧바로 비행기에 오르는게 가능했어.



옷을 제대로 갖춰입지 않으면 비행기 탑승이 거부됐었지. 내 친구중 한명은 츄리닝 바지를 입고 공항에 갔다가 탑승 거부되서 집에 가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다음 비행기를 탔었지 뭐야.



뭔가를 알고싶으면? 구글이나 위키피디아가 없었으니... 백과사전을 갖고 있었으면 간단한 정보는 알수 있었지. 하지만 아주 중요한것들 부터 "그 영화에 누가 출연했지"같은 간단한 정보같은것도 도서관에 가서 자료수집을 하지 않으면 알수 없었어.



신문 기사를 찾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서 카탈로그책을 뒤진다음 마이크로피시 필름 수백장을 뒤지면 "어쩌면" 찾을수 있었어. 원하는걸 찾으면 손으로 베껴야 했었지.



자동차들은 맨날 고장나곤 했어.



페이스북이랑 제일 비슷한거? 먼저 옛날에 찍은 반 단체 사진을 꺼내. 그 다음 아직도 연락이 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국민학교때 네가 짝사랑했던 여자애의 전화번호가 있는지 물어봐. 그 친구가 걔 부모님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서 네게 말해주면, 넌 그 여자애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따님의 전화번호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묻는거야. 거기까지 성공이라면? 드디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약속을 잡을수 있어. 가게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카페? 도시에 사는 부자들이나 카페에 갔고) 기다리지만, 그녀가 나타나지 않겠지. 다음날, 그녀가 전화해서 말해, 가게로 가는 도중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주유소까지 걸어간다음 정비공을 불러야 했다고.
일주일 뒤, 드디어 그녀와 만나게 되지. 가게 앞에서. 왜냐면 다들 가게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으니까. 그제서야 드디어 넌 검지를 내밀어서 그녀의 팔을 누를수가 있어. 찜



시외전화가 비쌌다고 생각해? 해외로 전화를 걸려면 얼마나 들었을지 생각을 해봐! 우리 가족은 80년대 말에 네팔에서 미국으로 이민왔었는데, 전화요금이 너무 비싸서 네팔로 전화를 걸수가 없었지.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뉴욕에 사는 다른 이민자 가족들이 자주 쓰는 방법을 알아내셨어.


1989년이었어. 내가 아주 어릴적 기억들중에 가장 행복한게 뭐였냐면 매달 한번 제일 근사한 옷을 입고 가족들과 함께 외출을 하는거였지. 항상 금요일 밤이었는데, 가족 모두 아버지가 모는 낡은 링컨 컨티넨탈에 올라타고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파크에서부터 맨하탄 중심가의 42번가까지 올라갔었지. 80년대 말의 뉴욕은 아직도 위험한 동네였었는데, 6번가를 걸어 올라가면 신발 바닥이 껌과 유흥업소 찌라시로 뒤덮이곤 했었다고. 맨하탄 중심가는 아이들의 교육상 좋지 않은 업소들과 그 간판들이 가득했는데, 그땐 내가 막 "저 가게들은 해로운 가게들이다"란걸 알아차릴 나이가 됬을 무렵이어서 맨하탄으로 갈때마다 들뜨곤 했었어.



아버지는 중심가에 도착하면 7번가 주위로 차를 천천히 몰면서 길거리에 서있는 특별한 누군가를 찾곤 했었지.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람을 굉장히 잘 찾으셨다고. 찾으시면 차를 몰고가서 창문을 내리고 서툰 영어로 "How much?" 라고 물으셨는데, 보통 100달러나 75달러였지만 가끔 세일해서 50달러인 경우도 있었어. 돈을 주면 그 사람은 아버지에게 종이조각을 건넸고, 아버지는 공중전화박스로 들어가 전화 한통을 했어. 짧은 통화를 끝낸 후에 우린 파라마운트나 루즈벨트같은 고급 호텔로 갔었지.



지금까지 이 이야기가 수상하고 이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별거 없어. 아버지가 찾던 그 사람은 그 당시에 뉴욕 전체의 전화선을 독점하던 벨 아틀란틱 회사의 직원이었거든. 그들은 매일 전화 코드를 지급받았는데, 그 코드만 있으면 세계 어디라도 무료로 통화를 할수 있었지. 브루클린의 우리 집에서 네팔로 전화를 걸면 통화료가 분당 6달러정도 나왔는데,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우린 돈쓰는건 싫어하고 말하는건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100달러만 내면 네팔에 있는 친지들과 맘대로 대화할수 있는거였지. 길거리의 공중전화에서 코드가 먹힌다는걸 확인한 후에 우린 고급호텔 로비의 안락한 전화실(공중전화가 있는 방)로 들어간거였어. 이 코드들은 마치 마법처럼 그날 자정에 바뀌어버려서 다시는 사용할수가 없었지만 상관은 없었지. 네팔의 친지들과 네다섯시간은 통화를 할수 있었으니.



굳이 금요일밤에 나간 이유는 다음날이 토요일이었으니 학교를 걱정하지 않고 밤 늦게까지 할머니와 이야기 할수 있었기 때문이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까닭은 고급호텔의 전화실을 사용하러 갔기 때문이야.




워드에 공식을 입력하는 법을 묻는 편지를 종이에 써서 마이크로소프트사로 보냈었어 (80년대 말에 매킨토시2 컴퓨터를 쓰던때 이야기야).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에 일하는 프로그래머가 종이에 자세한 내용의 답장을 써서 보내줬었지.



한번은 내가 산 게임이 PC주니어(IBM에서 84년도에 발매된 컴퓨터)에서 안돌아가길래 종이에 항의편지를 써서 개발사로 보낸적이 있어. 그리곤 게임의 박스아트에 나오는 3명의 개발자중 한명으로부터 디버깅을 하는 자세한 내용이 쓰인 답장을 종이편지로 받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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